027 그의 두 번째 이름 <베르느레이>, 이것은 외할머니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처럼 미래의 몽끌라르는프랑스를상징하는두여자의이름을오랫동안따르고지녔다. 생시르7)의 우수한 생도였던 그는 1914년에 소위가 된다. 그는 부상을 7회 당 하고, 두부 수술을 2회 하게 되며 표창을 10회나 받게 된다. 한 외과 의사가 독일군의 유산탄(榴散彈)에 의해 갈기갈기 찢어진 그의 다리를 절단하려 했을 때 그는“나는 이 다리가 필요 하오.”라고 하며 수술을 거부했다. 그는 다리를 잃지는 않았지만 평생 동안 다리를 절어야 했다. “그러나, 내가 공격을 하러 떠날 때 고맙게도 나는 다리가 마비되었음을 잊는 다.”고 그는 말하곤 했다. 놀라운 그의 일생이 보여주는 것은 정말로 끊임없는 공격 정신이었다. 지중해 동쪽 르방에서, 모로코에서, 아주 작은 전장이라도 찾을 수 있으면 그는 도처 에서 싸웠다. 사람들이 1939년에서 1940년 기간 동안 프랑스의 유일한 승리라 불렀던 <나르빅 탈취>8)는 그가 이룬 것이었다. 또 다시 전투를 위해 정복 상의에 모든 훈장을 달고 몽끌라르, 그가 여기 한국에 있다. 1940년 6월 22일부터 그는 영국에 있었고 그가 전장의 이름으로 <몽끌라르> 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런던에 있던 때부터였다. 진정 전쟁을 좋아했던 몽끌라르는 이런 자기 성향이 결혼과는 양립될 수 없는 것이라고 오랫동안 믿어왔다. 그러나 기막힌 사랑의 이야기가 그의 인생을 더욱 밝게 해준다. 몽끌라르는 1918년에 독일군의 포탄 파편에 의해 갈가리 찢겨져서 의사들도포기했던이용사의몸을헌신적인봉사로돌보아서그의생명을구해준 간호원의 딸과 1949년에 결혼한다. 그러고 나서 몽끌라르는 몇 달 동안 평온한 은퇴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터졌고 그는 다시 한 번,“나, 여기 있소”라고 말하게 된다. 중장인 그는 한국에서 유엔군 산하 프랑스대대의 지휘권을 담당하기 위해 기꺼이 중령 계급을 달고 지원하게 된다. 맥아더의 코를 연상시키는 매부리코 위에 강철 테로 된 안경을 쓰고, 검은 베 레모를왼쪽귀위에비스듬히걸치고, 총알이빗발치는단장의능선위에서태평 하게 산책을 하고 있는 그를 본 사람들은 결코 그를 잊지 못할 것이다. 7) Saint Cyr : 프랑스 육군사관학교가 위치했던 곳.(프랑스 육군사관학교를 뜻하는 별칭임) 8) 나르빅 : 노르웨이의 항구로 1940년에 탈환됨. Ⅰ. 참 싸움꾼 프랑스대대 참전勇士들 참 싸움꾼 프랑스대대 참전勇士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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