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5 우리가 기습적이라고 하는 이유는 북한공산군 수뇌부가 UN군의 상륙 가능한 지역으로자연조건등을고려하여인천을제외하고군산, 원산을고려하면서방비 를 소홀히 했었기 때문입니다. 인천의 자연조건이 어떠한 것이었냐 하면 우선 약 10m에 달하는 조수간만의 차이가 있었고, 다음으로 바다의 깊이가 얕아서 군함을 운용하는데 제한이 되는 점, 그리고 또 해안이 개펄로 이루어져 상륙하 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 등이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의성공에이어 UN군은북한공산군을 38선이북으로물리쳤는데 북한공산군의 후퇴 경로는 보시는 바와 같습니다. 1950년 10월 1일, UN군 사령부 결정에 따라 한국군과 UN군은 38선을 돌파 하여 통일을 향해 북진하기 시작했고, 1950년 10월 26일, 한국군 선두부대가 압록강 초산에 도달하여 곧 통일이 다가온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중공군이 13집단군 예하의 18개 사단과 9집단군 예하의 12개 사단을 투입하여 개입함에 따라 UN군은 병력의 열세로 일제히 퇴각해야 했습니다. 중공군은 재래무기와 징, 꽹과리, 피리, 나팔 등의 악기를 갖고, 인해전술과 모택 동의 16자 전법을 활용하면서 공격해왔습니다. * 16자 전법은 ● 적진아퇴 (敵進我退) ● 적주아요 (敵駐我擾) ● 적피아타 (敵疲我打) ● 적퇴아추 (敵退我追) 「적이 진격하면 후퇴하고, 적이 주둔하면 혼란스럽게 하고, 적이 피곤해하면 공격하고, 적이 퇴각하면 추격한다.」는 전술입니다. Ⅱ. 한국 전쟁 - 프랑스 지휘 참모대 발표 참 싸움꾼 프랑스대대 참전勇士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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