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지평리 전투 북진한 유엔군은 1950년 10월 26일에는 한반도의 최북단인 압록강까지 진출 하여 자유롭고 평화스러운 통일을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중공군이 엄청난 병력과 인해전술 로 공격을 하여 유엔군은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고, 중공군의 계속적인 공세로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다시 내주며 평택-삼척을 연하는 선을 간신히 유지하였 습니다. 그러나 유엔군은 다시 반격을 개시하며 주도권을 잡게 되고, 이 단계에 지평리 전투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프랑스대대의 역할에 대해 설명을 하겠습니다. 프랑스대대는 1950년 11월 29일 한국에 도착했고(해군은 1950.7.29. 부터 참전), 초대 대대장은 몽 끌라르 중령이었으며 (그의 본명은 샤를 라울 마그랭 베르느레이), 대대 병력은 1,017명인데 장교 39명, 사병은 978명이었습니다. 프랑스대대는 중공군에 맞서 여러 주요 전투를 수행하였습니다. 1951년 1월 31일부터 2월 2일까지 원주 인근의 쌍터널 전투를 시작으로 1951년 2월 13일 부터 2월 15일까지는 지평리에서 전투를 했고, 1951년 9월13일부터 10월 13일 까지는 단장의 능선 전투를 치렀으며, 1952년 10월 6일부터 열흘간은 화살머 리고지 전투를 수행했습니다. 이제 지평리 전투에 대해 설명 드리겠습니다. 1951년 2월 5일부터유엔군은美 10군단과한국군 3군단이참여하는‘Roundup’작전을 전개했습니다. 그러자 작전개시 7일 후가 되는 1951년 2월 11일부터 중공군이 대대적인 공세 를 펼치면서 美 10군단을 돌파하게 되고, 이로 인해 제23연대는 여러분이 위치 한 이곳 지평리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전면방어 진지를 편성, 적의 공격에 대비하게 됩니다. 당시 중공군의 병력은 5개 사단 약 11만 명이었고 반면에 23연대는 단지 5,739명뿐이었고 그중에 장교가 299명, 사병이 5,440명이었습니다. 23연대는 프리드만 대령 지휘 하에 미군 3개 대대, 1개 프랑스대대, 1개 포병대 대, 공병 중대, 전차중대, 대공포중대 등으로 편성되어 있었습니다. 098 참 싸움꾼 프랑스대대 참전勇士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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