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전쟁이다!

한국에서 전투를 한지도 거의 6개월이 지났다. 처음 한국에 와서 부상 없이 아직 살아서 전투에 임하고 있는 해병대원들에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부산을 둘러싼 낙동강 방어선은 단지 악몽 같았던 기억에 불과했다. 인천 상륙은 모든 북한군 전선을 우회하여 시행되었기 때문에 공산군들은 곧 패주하여 북쪽으로 달아났거나-혹은 항복했거나-혹은 농부의 옷을 입고 산속 고지로 사라졌다. 그 후 얼마 안 있어-9월 27일-서울 국회의 연설에서 맥아더 장군의 공표에 따라 서울시는 공산군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이것은 서울을 빼앗긴 지 정확히 3개월이 된 때였다. 그러나 어떠한 공식적인 발표도 아직 시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적군에 의해 이승만 대통령이나 맥아더 장군이 저격당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 중인 군인들이 국회의사당을둘러싸고있다는정보를알리기위해노력하지는않았다.“해방”발표가 있었던 직후의 며칠 동안에 서울에서는 많은 미군 병사들이 부상을 당했고, 또 전사 했다. 공산군들은 전투가 끝났음을 알리는 라디오방송을 듣기보다는 죽어가면서도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는데 더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전투가 끝났다. 전투에서 죽지 않은 적군은 항복하거나 숨어버렸고, 나머지 적군은 방향을 돌려 그들이 왔던 북쪽으로 후퇴해갔다. 미 8군의 병사들이 즉각 그들을 추격했고, 그동안 남·북한 간의 경계였던 38선에 도달했다. 그리고 곧바로 그 선을 돌파해 나아갔다. 공산군들은 저항다운 저항을 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들의 수도였던 평양에서조차도. 그리고, 8군의 장병들이 북진하고 있는 동안에,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창설되었던 새로운 부대인 제10군단이 배를 타고 한반도를 돌아 북동쪽 해안에 있는 원산과 흥남에 상륙했다. 이 제10군단은 7사단과 해병 제1사단, 그리고 3사단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이 부대는 8군 사령관인 워커 장군이 아니라 맥아더 장군의 직접 지시를 받는 부대였다. 그래서 전장에는 이때 서로 분리된 두개의 이원화된 지휘체계가 존재하게 되었다. Ⅵ. 장진호 전투:“후퇴라니, 말도 안 돼!” 160 l Ⅵ. 장진호 전투:“후퇴라니, 말도 안 돼!” This is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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