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동료들을 조심스럽게 지나쳐 갔다. 나는 이들을 따라나섰고, 얼마 되지 않아서 발목이 부서져 말없이 고통을 삭이고 있는 또 다른 부상병이 길을 따라 있는 담에 기대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동료는 식사를 마치고 누군가 이 부상병을 한참 아래에 있는 기지까지 같이 운반해 주기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전선”을향해가는길은공산군의포화가그들에게떨어지기전에숨을곳을찾기에 충분히 빠를 수 없었던 불쌍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지역에 박격포 포탄이 꽤 많이 떨어졌으나 인명손실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 산허리를 따라서 252명의 적이 사살되었다고 보고되었으나 나는 단 한 명도 보진 못했다. 산 정상 근방의 토치카로부터 백 야드도 채 떨어지지 않은 전방 진지에서 한국군 병사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저녁밥을 분배받고 있었다. 병사들이 식사하는 소리 이외에는아무소리도없었다. 나는양쪽의병사들이저녁식사를하는동안‘한국인의 계약’과 같은 무엇이 아마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들 가운데서 나는 두 개의 수통을 보았다. 나는 어떻게 한낮의 무더위에서 이것 들이 남아 있었는지 궁금했지만, 내가 능선을 올라 그들 곁을 지나갈 때 부상병들이 내 다리를 잡을 때 내가 적어도 그들에게 줄 수 있는 무엇을 가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마침내 산 전체에 한국군 병사들이 산재해 있고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가 만족한 듯이 상부로부터의 어떤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나는 단 한 명의 한국군 장교도 보지를 못했다. 아마 그들은 정찰 중이거나 아니면 좀 떨어진 통나무에 앉아 식사하는 중인 것 같았다. 그러나 병사들은 분명히 지휘자가 전혀 없는 것 같았고 적의 박격포 공격에 매우 취약한 상태로 다 같이 모여 있었다. 아무도 해질녘의공격에다시토치카를타격할의도를갖지않은것같았으나그들은최대한 토치카 가까이 접근하도록 명령을 받았고 그렇게 했다. 한국군들과 함께 앉아서 밥을 나누어 먹으면서 나는 모든 미군 보병 중대에 그들을 100명씩 편입시키려는 소문에 가까운 제안이 이치에 맞다는 생각이 들었고, 미국 군인의 보통 수준의 리더십과 전우애 정도만 가지면 저 한국 군인들이 분기하여 북으로 반격해 갈 수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또한 후퇴하며 지쳐버린 미군들이 피난 민들에 대한 폭력 행위로 야기되는 심각한 사회적 정치적 문제의 답을 찾는 계기가 68 l Ⅲ. 1950년 한국 This is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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