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북한군은 6월 25일 새벽, 38선을 넘어 기습공격을 감행했고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합니다. UN은 북한의 군사 침략을 중대한 도발로 규정하고 대한민국에 대한 지원을 결의합니다. 미 극동군사령부는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를 평택 전선에 투입했지만, 전열을 완전히 정비하지 못한 스미스 부대는 1950년 7월 5일 오산 부근 죽미령 전투에서 패배했고, 미군은 금강으로 후퇴합니다. 이어서 낙동강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았던 부산교두보작전과 위기를 기회로 만든 인천상륙작전은 UN군이 서울 탈환을 위해 부산에서 서울로 진격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국군과 UN군은 서울을 완전히 탈환하고 10월 1일에는 국군 제3사단이 38선을 돌파하게 됩니다. 이튿날, 맥아더 장군은 북진을 위한 작전 명령을 전군에 전달했고 UN에서도 통일된 민주 정부를 수립한다는 취지로 북진을 결의합니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점령한 국군과 UN군은 머지않아 전쟁이 끝날 것으로 전망했지만, 그 사이 중공군의 개입이 치밀하게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쟁의 주도권을 빼앗긴 국군과 UN군은 남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합니다. 팽팽한 정전 협상과 치열한 고지 쟁탈전이 동시에 계속되며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집니다. 오랜 협상 끝,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드디어 정전협정이 체결됩니다. 모두에게 기나긴 악몽이었습니다. 악몽의 끝을 기다렸지만, 정전협정은 완전한 전쟁의 종결은 아니었습니다.
3년 1개월, 1,129일 전쟁의 시간. 한국전쟁실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6·25전쟁의 흐름 속 UN과 대한민국 그 인연에 주목합니다. 대한민국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부산항에 입항한 UN군이 낯선 땅에 처음 발을 딛던 생생한 모습, 적의 공격뿐만 아니라 추위와도 싸워야 했던 장진호 전투, 크리스마스의 기적 흥남철수작전, 전쟁고아 구출을 위한 유모차수송 작전 등 평화로운 오늘날이 있기까지 희생과 헌신으로 지켜낸 지난날을 우리는 기억할 것입니다.
UN안보리 결의 제 84호 복제 1950. 7. 7 | 17.7×25 / 20.3×28
UN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제84호는 1950년 7월 7일 채택된 결의문이다. 주요내용은 UN의 결의에 지지해준 회원국에 대한 감사와 미국이 주도하는 통합군(UN군) 사령부에 병력과 지원을 위임하고 UN기를 병용할 권한을 부여한다는 것 등이다.
타임지-월튼 해리스 워커 육군 장군 표지 1950. 7. 31 | 21×28
1950년대 타임 잡지 표지로 6·25전쟁 동안 미 제8 육군 지휘관이었던 월튼 해리스 워커(Walton Harris Walker) 장군의 이미지를 게재하고 있다.
* 이미지는 칼 마이던스(Carl Mydans) 촬영
부산항 디오라마
UN결의안에 따라 군인과 군수물자들이 도착하는 부산항의 모습과 당시 피란민들이 도착했던 부산역 그리고 영주동에 형성되었던 피란촌을 재현한 공간이다.
미국 제 10군단 인천상륙작전 참모연구 1950년대 | 20.8×29
인천상륙작전과 관련한 참모들의 작전상황 보고서이다. 1950년 8월 12일 작성된 최고 비밀등급 문서로, 9월 15일 작전일에 시행해야 할 인천 상륙과 사수, 공항과 서울의 점령에 따른 작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또한 작전의 성공과 실패 상황을 가정하고 그 대책 또한 간략히 기술되어 있다.
정전협정 복제 1953. 7. 27. | 34.3 × 29.5
6·25전쟁 중단을 협의한 정전협정 문서로 총 5명의 서명이 들어가 있다. 협정 당시 미국의 해리슨, 북한의 남일, 중국의 팽덕회가 서명하였고 추후 북한의 김일성과 UN군 총사령관이었던 클라크가 서명하였다.